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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럼 흐룬 판 프린스테러르(Willem Groen van Prinsterer, 1801–1876)는 19세기 네덜란드의 역사가이자 기독교 정치가로, '반혁명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헤이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22세에 법학과 문학 두 개의 박사 학위를 같은 날 취득한 그는, 왕실 비서관과 의회 의원을 역임하며 50여 년에 걸쳐 교회와 국가, 교육과 사회 전반에 걸쳐 기독교적 원리를 공적 영역에서 증언한 실천적 사상가였습니다. 30대 초반 헤베이(Réveil) 부흥 운동을 통해 살아있는 신앙을 갖게 된 그는 이후 스스로를 "칼뱅의 후예이자 헤베이의 자녀"라 고백하며, 믿음을 사적 영역에 가두려는 시대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1847년 출판된 『불신앙과 혁명(Ongeloof en Revolutie)』은 약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21명의 친지를 자택으로 초대해 토요일 저녁마다 강의한 열다섯 편의 강연을 묶은 필생의 역작입니다. 이 책은 프랑스 혁명을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창조 질서를 인간의 이성과 자율로 대체하려는 포괄적인 사상적·영적 혁명으로 분석합니다. 흐룬은 이 혁명의 정신이 18세기 계몽주의에서 발원하여 자신의 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역사적으로 논증하며, 서구 문명이 "영구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 책은 공산당 선언보다 1년 앞서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 이념의 내적 논리가 결국 새로운 공포정치로 귀결될 것임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종종 '예언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흐룬 판 프린스테러르는 그동안 국내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전임자 정도로만 간략히 언급되어 온 인물입니다. 그러나 카이퍼의 신칼뱅주의 공공신학과 영역 주권 사상의 뿌리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스승의 사상과 씨름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실제로 카이퍼는 『불신앙과 혁명』 재판을 받아들고 흐룬에게 "선생님은 제게 선생님 마음의 사진을 주셨습니다"라고 편지했으며, 이후 자신의 전 공적 생애를 이 책이 정의한 '혁명'에 맞서는 일에 바쳤습니다. 본 연구소는 흐룬 판 프린스테러르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속화의 압력 앞에서 신앙의 공적 증언을 고민하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개혁파 공공신학의 원류가 전하는 메시지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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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수용 ​ 『불신앙과 혁명』은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으며 12번 재판되었고, 마지막은 2008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출간 첫날부터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선도적인 네덜란드 역사가들은 이 책이 끼치게 될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저작으로서의 측면에서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 로베르트 프라윈(1823–1899)은 성경에 대한 방대한 인용 때문에 이 책을 피상적이며 학문적이지 않다고 불렀습니다.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이 저작을 "분노와 불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피터르 헤일(1886–1966)은 이 책을 "하나의 거대한 실수"라고 일축했습니다. 반면 프레더릭 카럴 헤레트손(1884–1958), 헨드릭 스미트스캄프(1907–1970), 야코프 캄프하위스(1921–2011), 아리 판 더르선(1931–2011) 같은 역사가들은 흐룬을 옹호하며 그의 책의 기본 논제를 지지했습니다. ​ 그렇지만 어느 쪽에서도 저작의 특정 측면들에 대한 비판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K. L. 폰 할러와 같은 학자에 의존하면서 흐룬은 군주제를 공적 신탁이 아닌 왕 개인의 사유물로 묘사하는데, 이는 프리드리히 율리우스 슈탈의 정치 철학을 알게 된 뒤 제2판에서야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오류입니다. 그는 이념의 역학을 논할 때 논리의 언어를 고집스럽게 사용합니다. 용어 면에서 물리적 인과성과 역사적 인과성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경제적인 것과 같은 기여 요인들과 이차적 발전들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교황권에 대해 불필요한 독설을 퍼붓습니다. 철학자 헤르만 도예베르트(1894–1977)는 흐룬을 "기독교-역사적 정치 이론 학파의 지적 아버지"로 예우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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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구성 ​ 『불신앙과 혁명』은 잘 짜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열다섯 편의 강의 혹은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 두 편의 서론적 강의 다음, 이어지는 세 편은 흐룬 논제의 "부정적 부분"을 형성합니다. 즉 프랑스 혁명이 구체제(ancien régime)의 지배적 원리들(3강)에도, 기존 통치 형태들(4강)에도, 부인할 수 없는 폐해들(5강)에도 귀속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자주 언급되는 이 원인들은, 개별적으로든 결합해서든, 이 정도의 깊이와 규모를 지닌 혁명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이 흐룬의 주장입니다. ​ 다음 네 편인 6강에서 9강까지는 흐룬 논거의 긍정적 논증을 형성합니다. 즉 장기적인 근본 원인이 어떻게 혁명을 설명하는가입니다. 먼저, 혁명은 근세 초기부터 새로운 사회계약론에 의해 준비되었습니다(6강). 동시에, 개신교 종교개혁은 역사적 신앙의 증가하는 붕괴 조류를 막지 못했고, 성장하는 불신앙의 일시적인 유예 역할만 했습니다(7강). 이어서 8강은, 기독교 종교 내부의 배교 세력과 합리주의 형태의 불신앙의 부상이 성경 권위에 대한 존중을 어떻게 대체했는지를 논합니다. 불신앙이 인류의 신념과 윤리를 형성하는 새로운 원천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9강은 인간 자율성 형태의 불신앙이 신적 주권을 대체하여 국가와 사회의 새로운 기반이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 요컨대, 불신앙은 계시를 이성으로, 정의를 편의로 대체했습니다. 점점 더 진리는 합의의 문제가 되었고, 그 주장은 합리적 근거를 갖추고 널리 수용될 때만 유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행동은 갈수록 편의, 즉 무엇이 유익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가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 10강에서 저자는 혁명의 실제 역사를 고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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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논제 ​ 흐룬 판 프린스테러르의 방대한 저술 가운데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담아낸,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은 1847년에 출판된 『불신앙과 혁명: 역사 강연 시리즈』입니다. 이 책은 조국과 서유럽 전반의 위기가, 현대인의 정신을 장악하여 사회와 정치를 건강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파괴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온 지적·영적 혁명에 의해 야기되었음을 논증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혁명"이라는 말은 정부 전복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지적·영적 관점에서 일어난 포괄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가리킵니다. 흐룬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상세히 다루는 이유는, 이 극적인 일련의 사건들이 이런 종류의 혁명이 구체적인 현실 정치 실험에서 실행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로 보여준 사례라는 그의 주장에서 비롯됩니다. 그의 서술은, 프랑스 혁명의 원천과 과정, 그 여파를 분석하면서 근대 역사상 이전의 모든 정치적·사회적 격변과 비교하여 그 고유한 성격을 밝히는 내적 일관성과 정합성에서 두드러집니다. ​ 흐룬은 에드먼드 버크(1730–1797)의 저술과 루이 드 보날(1754–1840), 조제프 드 메스트르(1753–1821), 펠리시테 드 라므네(1782–1854) 같은 프랑스 반혁명 사상가들의 저작에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벨기에 봉기를 1789년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준 것과 동일한 자유주의 이념의 발작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이념의 본질을 깊이 파고든 흐룬은, 이 혁명들이 단순한 정치적 격변이 아니라 사람들이 종교적 헌신에 가까운 애착을 갖고 있는 포괄적인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물들이고 있다는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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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 ​ 『불신앙과 혁명』 강연이 진행된 1840년대 중반, 흐룬의 조국은 벨기에 분리의 후유증에서 회복 중이었습니다. 새로운 상황에 맞게 헌법을 조정하기 위해 소집된 1840년의 '이중 의회'에서, 기독교-역사주의 개혁가 흐룬은 성장하는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의 비공식 지도자인 레이던 법학 교수 요한 루돌프 토르베커(1798–1872)와 격돌했습니다.  네덜란드는 복고 시대의 황혼기를 지나고 있었고, 고조되는 정치적 이견은 불가피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보수주의는 그 동력을 잃었고, 자유주의가 주도권을 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배 계층은 독재적 군주, 즉 경제적 번영뿐 아니라 종교적 획일화를 통한 단결과 화합과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는 온화한 중앙집권적 행정으로 군주를 지지해 왔습니다. 이 마지막 목표는 1834년 분리파 같은 종교적 이견자들에 대한 가혹한 조치로 이어졌습니다. 토르베커는 이 조치를 옹호했지만, 흐룬은 스페인 종교재판에 맞서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옹호한 16세기 투사 오라녜의 빌럼(1533–1584)의 후손이 다스리는, 전통적으로 관용적인 네덜란드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규탄했습니다. 한편, 더 현대적인 헌법 개정과 성장하는 중산층의 더 많은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은 공식적인 지연이나 노골적인 외면에 가로막혀 실망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1840년대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충족되었습니다. 1840년대는 해결의 실마리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정치적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불확실함과 좌절감의 분위기는 『불신앙과 혁명』의 첫 강의와 마지막 강의 모두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같은 강의들은 당시의 무기력함에 대한 불만도 토로합니다. 지적
『불신앙과-혁명』이란-어떤-책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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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룬 판 프린스테러르의 『불신앙과 혁명』은 공공신학의 고전으로, 초판 출간으로부터 1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선견지명을 갖춘 한 기독교 정치가의 선언문이자, 기독교 정치사상의 불후의 진술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완숙한 사상가의 저작으로서, 이번에 영어 축약본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된 이 책은 당대의 시대 정신을 예리하게 비판한 저술로서 저자를 시대의 탁월한 분석가로 각인시켰습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결코 끝난 사건이 아니며, 그 사상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고, 그 사상은 사회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18세기 계몽주의 이래 서구 문명이 빠져든 "영구 혁명"에 도전해야 한다는 강력한 논거를 제시합니다. 흐룬에 따르면, 우리 문화는 점점 더 세속적 인본주의를 앞세운 지적·영적 혁명의 지배 아래 놓여가고 있으며, 이 혁명은 인류와 사회를 향한 창조 질서를 거듭 파괴해 왔습니다. 이 혁명이 오늘날까지 거의 쉼 없이 이어져 오고 있기에, 이 책의 메시지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오히려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저자 소개 빌럼 흐룬 판 프린스테러르(1801–1876)는 네덜란드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입니다. '기욤(Guillaume)'이라는 공식 세례명은 헤이그의 프랑스어권 왈룬 교회에서 받은 것입니다. 흔히 이중 성(姓)을 앞부분만 줄여 '흐룬 박사'라고 부르는 그는 네덜란드 사회와 문화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조국에서 '반혁명' 운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의회 안팎에서 두려움 없이 정치적 발언을 이어간 논객이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인정하듯, 빌럼 흐룬은 미지근한, 어쩌면 형식적인 기독교인으로 성장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