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설교
광야의-사람(막-1:1-8)
24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최초의 문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시고 죽으신 뒤 약 30년 동안 복음은 말로만 전해졌습니다. 기록이 필요 없었던 것은 목격자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20년쯤 뒤에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고전 15:6)라고 말합니다.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은 설교하러 다니실 때 하늘을 날아다니셨다"고 지어내면, "내가 거기 있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할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세대가 지나 사도들과 목격자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자 위험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만의 예수를 지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목격 증언을 모아 예수님의 생애로 엮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3-4)라고 씁니다. 우리가 지어낸 예수가 아니라, 실제로 말씀하시고 행하신 진짜 예수님을 주려는 것입니다. ​ 오늘날 이것이 절실합니다. 제가 1980년대에 뉴욕에 왔을 때 예수님은 한물간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10년 사이에 영성이 폭발했고, 모두가 예수님께 관심을 갖습니다. 다만 자기 조건대로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내 욕망에 맞게 빚어낸 예수는 나를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만든 예수는 내게 도전하지도, 내 생각을 반박하지도 못합니다. 그 예수는 결국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정말 변화시킬 예수님을 원한다면 진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
여호와의-손(삼하-24:10-19)
23
사무엘상·하는 두루마리가 하나에 담기지 않아 둘로 나누었을 뿐, 본래 한 권의 책입니다. 이 저자가 다윗의 이야기를 끝내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다윗의 노년과 죽음은 다른 책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이 장면에서 이야기를 마칩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 장면을, 무엇이 한 사람의 인생을 세우고 무엇이 무너뜨리는가 하는 오랜 주제의 요약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 세 가지 질문이 곧바로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왜 또 심판하십니까?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의 수를 세는 것이 왜 죄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왜 형벌을 끝까지 집행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을 치지 않으십니까? ​ 1. 왜 이런 심판입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을 전염병으로 치시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이 도시나 나라를 심판하시는 대목을 살펴보면, 거의 언제나 심판은 인간의 폭력 위에 내려옵니다. 노아의 홍수는 땅에 강포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자기 폭력을 버리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가난한 자를 압제한 죄로 심판을 받았습니다(겔 16장 49절). 아모스서는 이웃에게 위협이 될 군비 증강을 심판합니다. ​ 서구 사람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폭력이 늘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야말로 폭력이라는 독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입니다. 폭력의 피해자가 되면 보복의 순환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학대받은 사람이 학대하는 사람이 되기 쉽고, 발칸에서 인종 청소를 저지른 쪽은 "지난 세기에 저들이 우리에게 했다"고 말하며, 상대편도 똑같이 말합니다. 이 순환은 끝이 없습니다. ​ 발칸의 한복판에 있었던
고통받는-자(삼하-12:13-25;-시-39:7-13)
22
우리는 지금 다윗의 생애를 보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으면 인생이 세워지고, 없으면 인생이 무너지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매주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고난과 비극을 마주하고 처리해 내되 마음이 쓰라리게 굳어지거나 절망에 잠기지 않는 능력입니다. 이 이야기는 세 부분입니다. 다윗이 땅에 엎어지고, 땅바닥에서 씨름하고, 그 땅에서 일어납니다. 1. 다윗이 땅에 엎어졌습니다 ​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그를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밧세바에게서 얻은 갓난아들이 병들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다윗은 땅에 엎어집니다. ​ 그는 왜 땅에 있습니까. 물론 그것은 기도의 자세이고, 그 자신도 기도하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 늙은 신하들이 그를 일으키려 합니다. 기도를 그만두게 하려는 뜻일 리는 없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가 땅에 있는 것은 짓눌려 내려앉았기 때문입니다. ​ 때로 인생의 슬픔은 너무 커서 말 그대로 몸을 땅바닥까지 짓눌러 버립니다. 공포에 너무 크게 얻어맞아서, 슬픔에 너무 깊이 병들어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던 적이 있습니까. 다윗이 지금 그 자리에 있습니다. ​ 1988년 팬암 103편 여객기가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발했습니다. 비행기 안의 259명이 죽었고, 지상에서 11명이 죽었습니다. 한 여인이 그 사고로 하나뿐인 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타임지에 짧은 글을 하나 썼는데, 제가 그 글을 따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 여인은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는 것, 비명을 지르는 것, 모텔 복도 바닥을 기어다니는 것뿐이었
죄인(삼하-12:1–7;-시-51:1–12)
21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고대 문헌 전체를 통틀어 한 개인의 인생을 가장 길고 가장 위대하게 서술한 단일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 오늘 다룰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인생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하더라도 다시 복구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심하게 부서졌다 하더라도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의 이름을 말하기가 두렵습니다. 여러분이 이 이름을 들으실 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입니다. "아, 그거요. 그거야 누구나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이미 알고 있는데요."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적어도 이삼 년 동안, 제 삶에서 반드시 바뀌어야 할 것들이 참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회개를 다룬 17세기 영성 서적 두어 권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회개라니, 참 케케묵었구나, 참 부정적이구나." 그런데 읽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깊고 영구적인 변화의 비밀이구나." ​ 여러분이 바꾸려고 애쓰는 것들이 늘 다시 돌아오는 것 같다면, 성경이 회개라는 단어로 의미하는 바로 그것이 그 문제를 푸는 비밀입니다. 다윗의 이 사건, 그리고 밑바닥에서 쓴 그 시편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가장 좋은 자료입니다. 회개의 부르심, 정황, 구성 요소, 능력을 살펴보겠습니다. ​ 첫째, 회개의 부르심 ​ 하나님께서 다윗을 회개로 부르십니다. 어떻게 부르십니까. 이 사건의 심장부로 들어가려면 물어야 합니다. 다윗은
잃어버린-법궤(삼상-5:1–5;-삼하-6:1–15)
20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경뿐 아니라 고대 문헌 전체를 통틀어 한 인간의 삶을 가장 길게 다룬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가 말해 주는 것 중 아마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덕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전부 언약궤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그냥 상자라는 뜻입니다. 나무 상자에 금을 입힌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그 위에는 순금 판이 있었는데 그것을 속죄소라고 불렀고, 그 위에 금 천사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 언약궤는 성막의 중심 기물이었습니다. 성소의 가장 안쪽, 지성소에 있는 유일한 기물이었습니다. 그 궤 위에 셰키나, 카보드, 곧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무한히 무거운 하나님의 광채가, 직접적이고 인격적이며 왕적인 하나님의 임재가, 초월하신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것 없이는 버텨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것을 어떻게 얻는지 이해하려면 이 본문을 세 가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궤의 약속, 궤의 문제, 궤의 공급입니다. ​ 1. 궤의 약속 다윗은 왜 궤를 원했습니까? 궤는 20년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 간 뒤로 기럇여아림이라는 외진 곳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다윗이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 수도를 세우고 성막을 옮겼고, 궤를 가져오려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사회와 문화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관심은 사회적, 문화적 차원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개인적인 것
용사들(삼하-23:13–17)
19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대단히 극적이면서, 동시에 아주 어려운 주제를 함께 생각해 볼 자리이기도 합니다. 성경, 특히 구약에서 전사와 전쟁이 칭찬받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걸려 넘어집니다. 그래서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본문이 전사를 칭찬하는 것, 이 본문이 전사를 변혁시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참된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 "추수 때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는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자 다윗은 광야로 도망쳐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수백 명이 다윗에게 모여들었고, 다윗은 그중에서 서른 명에서 마흔 명 정도의 정예를 직접 골라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용사들, 히브리어로 깁보림이라 불렀습니다. ​ 그런데 이 사건은 다윗이 왕이 된 후의 일입니다. 다윗이 즉위하자마자 블레셋이 쳐들어왔습니다. 다윗이 사울보다 강한 나라를 세울까 두려워 싹부터 자르려 한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한복판을 뚫고 들어와 나라를 둘로 갈랐고, 르바임 골짜기를 점령했습니다. 베들레헴을 차지했고, 예루살렘에서 겨우 몇 킬로미터 거리까지 왔습니다. 갓 즉위한 왕 다윗은 다시 아둘람 굴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 참혹한 시기였습니다. 13절이 말합니다. "추수 때에." 우연이 아니라 전략이었을 것입니
친구(삼상-18:3–4;-19:4–5;-20: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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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고대 문헌 전체를 통틀어 한 인간의 삶을 가장 길게 서술한 이야기입니다. 고대 문헌에는 위대한 서사시가 많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야기는 오직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무엇이 한 사람의 인생을 세우고, 무엇이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리는지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한 가지를 다룹니다. 이것이 있으면 인생이 세워지고, 이것이 없으면 인생이 무너집니다. 바로 우정입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저 유명한 우정,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따라가면서 네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정의 중요성, 우정의 구성 요소, 우정의 능력, 우정의 가능성입니다. ​ 1. 우정의 중요성 ​ 사울은 골리앗을 이긴 승리 후에 다윗을 궁정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18장에서 20장까지, 사울은 다윗의 성공과 인기를 향해 살기 어린 시기심에 사로잡힙니다. 사울은 여섯 번이나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처음 세 번은 은밀했고, 그다음부터는 노골적으로 변합니다. ​ 이 기간은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집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툭하면 격분에 사로잡혀 발작을 일으키고는 다윗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다윗은 필사적으로 이 폭풍을 견뎌 내려 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영원한 원수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 가장 끔찍하고 위험했던 이 시기, 곧 18장, 19장, 20장을 보십시오. 이 무서운 사건이 시작되는 18장 맨 앞에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가 끝나는 20장 끝에 다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있습니다. 시작에는 언약을 맺는 장면이 있고, 끝에는 그 언약을 새롭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 이야기를
자기-해체(삼상-1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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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문헌 전체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가장 길게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한 인간의 삶을 세우고 무엇이 무너뜨리는가에 대해, 고대 세계의 모든 기록 가운데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위대한 기록입니다. 이것을 성경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해도,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아주 세심하게 주목하셔야 합니다. 이번 주 본문이 가르치는 것은 시기심의 절대적인 파괴성입니다. 제가 설교한 지 28년 반쯤 됐고 수천 편을 설교했는데, 이번에 준비하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시기심에 대해 설교한 것이 평생에 두세 번밖에 안 되더군요.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목회자는 사람들이 물어보는 주제를 이야기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말합니다. "저는 분노에 문제가 있습니다. 죄책감에 문제가 있습니다. 낙심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시기심에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평생에 한 번도 못 봤습니다. 그러나 성경 교사인 제 임무는 본문이 말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지, 여러분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오늘 저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성경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도, 수 세기 동안 지혜로운 사람들은 시기심이 모든 인간 비참의 뿌리인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시기심, 시기심이 만드는 노예 상태, 그리고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 1. 시기심 ​ 먼저 사울의 시기심을 보십시오. 가장 전형적인 묘사가 7절에서 9절에 나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